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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혹성의 미학 그 아름다움

리프 스토리 발행일 : 2023-04-17

잔혹성의 미학 앙토냉 아르토의 잔혹 연극의 미학적 접근의 방법

앙토냉 아르토

앙토냉 아트로 그리고 잔혹성의 미학

 

앙토냉 아르토 그에게 있어서 삶, 연극, 잔혹성은 불가분 관계를 맺고 있다고 합니다. 오늘날 현대연극에서 잔혹극은 바로 아르토라는 이름으로 연상되고 있습니다. 고통의 삶과 실체험의 잔혹성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 아닐까 조심스레 생각해 본다. 아르토에게 있어서 연극은 무엇이었을까? 삶 그 자체이며 반대로 삶이 연극이며 시인 랭보가 지옥에서의 한 철을 노래했듯이 아르토의 삶은 지옥 그 자체였다고 합니다. 그는 시, 연극, 영화, 그림 등 다양한 예술적 창조와 정신적 탐구를 시도했다고 하는데 자신의 삶은 구원할 수는 없었다고 합니다. 그의 고독은 마약과 광기, 정신 병동의 수감자로 만들었다. 결국 광인이라는 존재가 되기까지 죽도록 처절하게 자신의 삶을 개조하려고 했던 아르토가 선택한 잔혹 연극의 정체가 무척이나 궁금해졌습니다. 그 속에 무슨 진리가 담겨있으려나? 절대적이고 변화하지 않고 영원한 것이라는 것이 존재하는 걸까? 아무튼 그의 이념이 어떤 것이든 지금 이 시대에도 신화적 존재로 남아 있다면 어떤 측면인지 알아보면 그것은 바로! ‘연극을 통한 세계의 재창조인 것입니다. 결국엔 하나의 소우주라 할 수 있는 개인의 개조는 대우주의 혁명을 예고하는 시작점이 되며 그래서 아르토는 잔혹극의 궁극적 목표를 자신을 포함한 인간의 치유에 두었으며, 이것은 전통의 서구 연극을 파기하고 새로운 연극을 구축 및 가능하다고 판단했습니다. 작은 점 하나가 폭발하여 빅뱅을 일으키고 엄청난 속도로 팽창하여 하나의 물질세계가 만들어졌습니다.

 

우리 은하 세계에서 우리 브레인 말고 다른 브레인이 생성되어 두 가지가 충돌하듯 새로운 세계라는 역사를 쓰고 있으며 아르토는 1986년 프랑스 마르세유에서 태어났으며 그는 시, 그림에도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일생 동안 여러 차례 정신병원 생활을 했는데 18세라는 나이에 우울증과 두통의 증상으로 나타났고 그의 신체적인 질병은 인간으로서 저주받은 것이지만 시인으로서 예술적 영감의 원천이 되었으며 그의 퍼스낼리티(각각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특성)는 아마 이때 형성되었을 것입니다. 청년 시절 정신병과 유전성 매독에 시달리면서 시작과 글쓰기, 연극에 몰두하며 고통과 싸워 나가고 그 지옥 같은 투쟁에서 존재에 대해 필사적으로 저항하였습니다. 그러나 글쓰기 만으로는 예술적 욕구를 극복할 수 없음을 인식하고 직접적인 경험을 위해 연극계에 뛰어들었습니다. 모든 작품들은 자아의 글쓰기로 완성된 하나의 자서전이며, 모든 드라마는 그 자화상 혹은 자서전의 패러독스 속에 강렬하게 녹아 있습니다. 이것은 죽음에 쫓기는 자신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또 다른 자신의 죽음을 추구해야 하는 거대하고 웅장한 모순에 빠져있는 것이며 이러한 죽음은 탐구를 초현실적 경험으로 간주했으며 거기에 다가가는 수단들로 시, , 무의식, 마약 등을 들었다. 이러한 수단들은 작품 속에서 강박관념적 모티프로 작용할 것입니다.

 

예술의 탄생과 창조경험

예술품 탄생의 비밀에 있어서 창조자 개인의 경험과 그가 속한 시대적 사회적 환경과는 무관하지 않습니다. 잔혹극은 잔혹한 아르토의 삶에서 새롭게 잉태했으며 그의 존재의 어려움과 고통스러운 현실을 극복하기 위한 방법으로 연극을 택했습니다. 자아의 배우가 되어 수많은 역할을 전전하다가 마침내 이르러서는 정신병과 암 환자의 배역을 끝으로 세상이란 무대에서 완전히 사라집니다. 그러나 그의 삶과 연극은 아르토 개인의 신화로서 영원히 존재할 것입니다. 잔혹성혹은 연극의 이 중에서 연극의 이중은 서구 문명에 필사적으로 저항하는 절망적인 외침입니다. 아르토가 이론적으로만 완성하는데 그쳤던 기능에 대한 재검토를 제안했습니다. 그렇다면 잔혹 연극이란 무엇일까? 연극에 대한 재검토라고 했지만 그것은 연극의 회귀 또는 연극적 행동에 대해 깊은 만족을 욕망하는 인간의 근본적인 성향을 존중하려는 태도입니다. 아르토가 추구하는 것은 이해의 범주가 아니라, 영혼에 영향을 미치는 즉각적이고 직접적인 서정시적 상태의 전형입니다.

 

연극의 시적 이미지들은 현실에 구애받지 않고 감성적인 것 속에서 자신의 궤도를 시작하는 정신의 힘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내 생각에도 인간이 만들어지는 과정이 유아기부터의 경험과 환경 한 인간이 어떤 사회에서 무슨 교육을 받아서 어떠한 선택과 결정을 하고 그것이 모여 본성과 충돌하면서 하나의 가치관을 형성한다고 생각하며 그것이 바로 정신의 힘의 원동력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르토는 개인주의는 본질적으로 사회의 그룹 내에서 고립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거리감, 즉 나와 타인 사이의 차이이며 나의 독립성과 우월성을 확립하는 방법입니다. 이러한 우월성은 연극적 제의에 의해 희생되며 그리고 관객은 자신이 가장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는 것이 공격받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잔혹성의 새로운 개념이 형태를 드러내기 시작하며 잔혹성은 반드시 핏빛이나 공포 사이쯤으로 치장되는 것이 아니라 극도의 엄밀함, 돌이킬 수 없는 냉혹한 운동으로 이루어집니다. 갈등의 원천으로 되돌리는 힘들의 부름이며, 만일 이런 갈등 이런 힘들이 어두운 것이라면 그것은 연극의 잘못이 아니라 삶의 잘못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연극은 격렬한 현시인 동시에 카타르시스를 불러오는 절정인 것입니다. 이러한 카타르시스적 절정을 통해 인간은 자신의 가능성과 힘을 자각하게 됩니다. 모든 감각이 극도의 절정에 이른 상태보다 덜 이성적인 과정이며 인간의 모든 생명력이 해방된 상태를 말합니다. 바로 이점이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카타르시스와는 다른 점이 흥미로웠습니다. ‘페스트처럼 연극 행위도 유익하며 인간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도록 유도하면서 가면을 벗기고, 거짓과 야비함 위선을 드러내 주기 때문입니다.

 

연극의 행동은 감각의 가장 섬세한 국부에 이르기까지 흥분시켜 질식 상태에 있던 신체 무기력증을 뒤흔들며 연극적 행동은 공동체 구성원들에게 그들 사회의 어두운 힘과 숨겨져 있던 힘을 들추어내서 그 사회로 하여금 운명 앞에서 어떤 영웅적이고 우월 태도를 취하게 만든다라고 정의하였습니다.  잔혹성의 연극적인 표현에서 ’ 잔혹성‘이라는 말의 개념을 언급하는 경우 사드 작품보다 잘 보여준 예는 없었다. 말 그대로 ’’ 잔혹성의 해부학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아르토의 선택은 분명했습니다. 그는 은연중에 사드의 극작품을 거부하고 있으며 하나의 패러독스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며 사두의 작품 <신성한 후작>은 여러 면에서 아르토의 미학적 개념들을 표명합니다. 그렇지만 이 작품은 아르토의 예술적 탐구의 테두리 밖에 있습니다. 그 이유는 사드의 진정한 극작품은 그의 소설과 콩트, 대화들 속에서 탐구되어야 하기 때문이며 실제 사드의 극은 소설들의 특징을 이루고 있는 독창적인 잔혹성이나 난폭함을 보여주지 않는다. 악은 자의적이고 거의 제멋대로 지배하고 있습니다.  반면 연극 속에서 악은 줄거리를 위해만 존재할 뿐이며 줄거리 역시 희미한 채로 있고, 잘 드러나고 있지는 않지만 도덕적, 교훈적인 집착에 의해 속박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권력의 메타포

권력의 메타포에서 존재의 사물의 본질은 무엇일까? 나라는 존재가 만들어지는 시점은 생일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즉 탄생입니다. 자신의 생일을 축하하는 사람의 심층 속정신 상태, 즉 일종의 심리 상태의 원형은 그렇게 엿볼 수 있습니다. 태어난 날은 죽는 날의 또 다른 모습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되며 그때 태어난 날은 죽는 날의 또 다른 모습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야릇한 전환의 순간인 것이며 존재는 자신의 과거 모습과 관련해서 죽고, 그와 함께 자신을 둘러싼 세계도 사라지며 각자에게 귀속된 사물들의 상태가 바로 그렇습니다. 무의식적으로 파티와 그에 따른 활동을 좋아합니다. 우리의 시선은 미래를 향하고 있지만 의식이 깨어나서 모든 타협을 거부하면 현실은 잔혹하고 체계적으로 파괴될 것입니다. 마치 악몽이나 불합리한 방식으로 파괴됩니다. 이러한 방식은 예술적인 관점에서 파괴와 은유적 재건을 동시에 포함합니다. <빅토르 혹은 권력을 가진 아이들>에서 로제 비트락은 이러한 정신 상태의 극적 표현을 서정적으로 제시했습니다.

 

’ 정신의 앞면과 이면을 스며들게 하며 비트락이 관객에게 제시한 원초적 순수 상태로의 복귀는 작가와 관객은 작품의 구조를 따르면서 제의는 시간 동안 은유적으로 사는 어려운 임무를 이행해야 하고, 심층적이고 신화적인 상태에 이르기 위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결국 작품 구조의 미학적 자료는 아르토의 잔혹극과 같으며 거짓된 외관의 안락함과 극작품의 실용성은 발 디딜 틈을 찾지 못할 것이고, 연극은 내용을 넘어서서 하나의 기호 표명이 됩니다. 인간 존재의 시적 초월에 관한 제의는 이렇게 존재의 ’ 영도‘에서 탄생합니다. 바로 거기에서 연극 예술은 자신의 위험과 존재 이유를 발견할 것입니다.

 

신화의 연극

제의와 신화의 연극은 무엇일까? 작가 미셀 드겔드로는 <태양은 지다>에서 한 등장인물이 ’’ 인간의 영원한 조건은 결코 인간이 인간화되지 않는다는 데 있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인간 조건을 제시한 작품으로 <파우스트><광대의 학교><동 쥐앙><크리스토프 콜롱브>등이 있으며 등장하는 겔그로드의 인물들은 진정한 자아 탐구를 위해 특별한 노력을 경주하고 있습니다. 현실과 비현실, 실재와 외관 사이에서 절망적으로 투쟁하며 그들이 추구하는 ’ 인간성‘에는 결코 도달하지 못합니다. 그들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가고 실망하여 크게 분노하며 그들은 괴물 같은 피조물에 불과할 뿐 자신들과의 싸움에서 희생자가 되어 모두 질식할 것입니다. 그 결과 무대에서 난폭 성과 광기로 채워지고, 거기에 익살과 우스꽝스러운 파르스가 신비주의나 마술과 복잡하게 뒤섞이며 창조된 세계에는 매우 저속한 본능과 비열한 두려움이 지배하는 광란의 물질주의가 스며 있습니다.

 

마치 묵시록의 분위기를 환기시킨다. 인간의 가장 추하고 외설스럽고 저급한 본능들이 나타난다. 따라서 겔드로드의 등장인물들은 겉모습과 모든 우연성을 넘어 진정한’ 인간성‘에 도달하기 위한 체계적 비인간화의 과정을 거치게 되며 이것은 아르토가 권장하고 있는 인간의 비개성화와 흡사합니다. 이러한 인물들이 등장하는 연극들의 목적은 위한을 주기 위함도 슬프게 만들기 위함도 아니며 하나의 사실이라고 말하며 나쁜 연극은 오로지 쾌락만 야기하며 훌륭한 것이라면 영혼의 즐거움을 줄 것이라고 덧붙이는 대목에서 나는 그동안 쾌락한 추구하는 시나리오만 쓴 거 같아 반성하게 되며 영혼을 즐겁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다시금 생각하게 되며 나 자신은 관객을 타락시키는 영화를 만들지 아니하고 관객의 정신을 고양시키는 영화를 만들기 위한 귀중한 토대로 삼았습니다. 무대(스크린)나 객석 사이의 심오한 합일에 의한 승화, 신화의 창조에 의해 가능할 것이며 바로 신화의 창조에 의해 도움이 되길 바랄 뿐입니다. ’ 연극은 공포에 떠는 희생자가 아니라 현명한 사람들이 세계의 현실을 바라보듯이 인간 자신의 진실을 직시하도록 돕고, 스스로를 더욱 명확히 파악하도록 돕는다는 말이 인상 깊었습니다. 진실은 어디에 있을까? 나의 제3의 눈을 뜨게 하여 그것이 잘 보이도록 훈련해야겠습니다.

 

잔혹연극에 대해서

잔혹연극의 주요 자료들 중 개인의 오부에서 생겨난 사건과 일치하는 시간의 흐름을 거부하는 것이며 시간을 인간 외적 현상으로 간주하는 이론을 거부합니다. 예술에 적용된 이 사건성의 개념은 현실의 초월이라기보다 하나의 모방을 의미하며 시간을 인과율의 논리에 따라 사회적 사건이 전개되는 외적 틀로 간주하는 한 그의 작품은 결코 인간적 경험의 심오함이나 사회적 우연성 밖에서 고려되는 존재의 심오함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단순히 일화나 늘 만날 수 있는 장식의 차원에서 맴돌 뿐이며 작품의 본질적 자아보다 사회적 자아에 더 호소하는 경향을 띠게 됩니다. 사무엘 배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인간이 기능적이고 실용적인 일련의 태도 속에서 시간의 구속을 받으며 존재하는 이분법적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이 시간은 사회, 경제적, 여타 모든 고찰로부터 벗아나 완전히 심층에 자리 잡고 있다. 해가 뜨고 달리 뜨면 시간이 지난 것입니다. 그리고 난 언젠가 세상을 떠나겠지? 내 존재가치가 무엇인지 시간과 함께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의자는 앉으라고 만든 물건인데 나의 존재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존재의 가치가 무엇일지 찾아가는 중입니다. 어린 시절부터 신화는 많이 접해왔지만 그 신들은 도대체 눈에 보이지 않는데 왜 믿어야 하는 거지? 만질 수도 들을 수도 볼 수도 만날 수도 나의 오감으로는 체험이 불가합니다.

 

누구는 영적인 감각이 죽어서 그렇다는데 그 영적인 부분도 보여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나에게 신화는 안개처럼 아련했으며 인간과 신의 새로운 신화를 낳는 데 수반되는 희생물인 건가? 아니면 현생에서 불평등한 사회적 구조에서 천국이라는 다음 삶을 희망고문하며 현생을 통제하기 위한 수단인가? 작품 <자동차 묘지>는 천지창조를 현대적 시각으로 그린 거대한 프레스코 벽화와 비교됩니다. 성부 성자 성신 인간의 삶 등 모든 요소가 들어 있고 그들은 면밀한 계산에 의해 짜인 유기적 조직체를 이루고 있으며 순환구조의 벽화는 인간의 밖에서 우월한 존재의 신화를 파괴하고 이 파괴 덕분에 최상의 존재와 삶이 직접 만날 수 있다고 하며 신화는 삶의 원동력이 되고 어떤 직접적인 결과를 야기하는 일 없이 자기의 역할을 완수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날개 꺾인 수많은 우상들을 계속 생산하는 신화는 과학의 발달로 점점 믿는 사람들이 줄어들으며 그저 창조의 제식의 기틀이라고 생각할 뿐입니다. 과학이 발전된 이 시점에서 신화가 살아남은 이유는 과학으로도 발견하지 못하는 영과 혼과 미지의 영역 때문에 신화가 아직도 이 시대에도 살아남은 이유가 아닌가 생각해 보며 영혼과 사후세계의 존재를 인류가 알게 되는 그날까지.. 신화는 계속됩니다. 아니 어쩌면 영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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