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연극미학 <마리-안 샤르보니에> 파헤치기
현대연극미학
현실과 모방
현대연극 미학에 대해 말해주는 이 책은 연극은 재현을 통해 세상을 표현하려 한다고 말하며 시작한다. 눈앞에 보이는 자연이나 사회, 역사적 현실을 충실히 모방하려는 계획을 세우는 것인가? 나의 첫 연극 관람은 로미오와 줄리엣의 햄릿이었다. 덴마크 엘시노어 성이며, 시대는 16세기 폭력과 전쟁, 살인 그리고 왕위를 찬탈하려는 사람들의 시대에 복수를 정당하게 생각하는 봉건적 가치의 재래 속에서 연극의 첫 번째 기능으로 관객으로 하여금 배우를 통해서 자기 자신, 즉 나를 인지하도록 해주었다. 왕이었던 죽은 아버지를 애도하는 햄릿 왕자는 죽은 부왕의 동생인 숙부와 곧바로 결혼한 엄마 때문에 행복하지 않다. 영웅적인 모습과는 다른 아버지의 영웅주의적인 모습과는 대조적으로 우유부단과 무능력으로 괴로워하고 있으며 숙부를 증오하며 왕비인 어머니에 대한 모순된 감정을 느끼며 더욱 괴로워한다. 햄릿은 자괴감과 용감하게 행동하지 못하는 자신에 대해서 죽고 싶을 정도로 정말에 빠져 고통받는다. 나는 연극을 보면서 순진하게 완벽한 환각을 느끼고 극장에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게 되었다. 이러한 것은 극 미학은 현대적이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고전극’과 같다는 의미도 아니다. 반면 상상력을 우선시하고 결말 부분에서 관객을 상상에서 현실로 도로 데려오려 하지 않는 모든 극 미학은 현대적이라고 특정 지을 수 있다. 연극이 18세기 이래 일반화된 부르주아 연극의 특징들과 단절하려는 순간 현대적이 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미메시스, 시학에서 말하는 극 행위의 중요성으로 서사시(이야기로 행위를 재현)와 드라마(보여 주면서 행위를 재현)를 대비시키면서 시학에서 연극의 토대가 되는 극 행위를 강조했다.
무대는 중개자나 스크린의 모둠 없이 픽션에 생명력을 불어넣는다. 극은 글을 말로 바꾸어야 하고, 그 말하기의 임무를 부여받은 이들이 배우이다. 연극 언어의 특징은 바로 역동성이다. 물리적인 장소 위에서 다양한 힘들이 서로 겨루고, 균형을 이루기도 하며 때로는 어느 한쪽이 승리를 거두기도 한다. 관객은 극의 발단, 전개, 그리고 절정을 보러 온다. 절정은 조화롭거나 잔잔한 혹은 비극적인 결말로 해결될 것이지만 여기서 어떤 결말이냐는 중요치 않다. 후에 선택된 장르(비극, 희극, 드라마)에 따라 세력들은 구체화되고 이름이나 얼굴을 갖게 될 것이며, 어느 정도 성격과 일치하게 될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모방’은 현실의 복사가 아니라 일종의 재창조이다. 삶의 구성 요소이자 흔히들 ‘에너지’라고 부르는 일차적인 행위에 대한 재창조를 말한다. 존재 방식이 아닌 행동 방식을 강조하며 비극을 쓰려는 작가들에게 역사에서 극 행위를 차용하도록 권유하면서 서양 연극미학의 주요 개념 하나를 이끌어 낸다. 그것이 바로 진실다움(vraisemblance)이다. 역사란 실제 일어난 일이기 때문에 진실다움을 보장한다.
역사가 실제 일어난 일을 이야기한다면, 시는 일어날 수 있는 일을 보여준다. 이것이 바로 현대 연극이 자유를 획득하기 위해 풀어 나가야 할 문제 중의 하나이다. 이것을 진실과 진실다움의 문제라고 말한다. 이야기의 개념으로는 상연 과정에서 참고될 일관된 총체 속에 포함되며 작품에서 말하여지는 것이다. 극 행위는 이야기의 범주 안에서 전개되고, 행동이 진전되면서 명확성의 원칙이 탄생한다. 명확성의 원칙은 연극에서 어떤 의미, 혹은 특정한 의미 구축을 가능케 한다. 이러한 이중적 단언의 결과는 즉각적이다. 이야기는 실제 세계에서 차용되어 모방된 상황을 수동적으로 재생산한 것이 아니라 고유한 논리를 가지는 어떤 것으로부터의 자연적인 산물이다. 한편으로 위에서 언급된 세력을 구현하는 등장인물은 이미 존재하는 성격에 따라 행동하지 않는다. 이미 존재하는 성격은 가능한 충실히 복사하기만 하면 된다. 그렇지 않은 경우 인물의 성격은 행동에서 비롯된다.
무대 안 상상력의 질서
일부러 만들어진 무대의 시간과 공간은 그 특성상 아무리 현실에 가까운 것일지라도 상연을 상상력의 질서에 따르게 한다. 무대의 시간과 공간은 실제 시간과 공간에 대한 이미지이다. 극의 시·공간은 실제 시·공간으로부터 벗어나고 있다는 측면에서 그러하다. 이미지는 사실이 아니다. 무대 위에서의 시간은 극 행위의 필요에 따라 가속화되거나 느려진다. 시간은 수렴과 응축될 수도 있으며 지나치게 늘어질 수도 있다. 유일한 제약으로 극 행위에 의해 한계가 지어진다는 점이다. 등장인물은 지속적인 극 행위들이 연결되는 지점이다. 지속적 극 행위로부터 한 가지 가능한 성격에 대한 밑그림이 그려진다. 아리스토텔레스가 극 행위의 중요성을 강조했을 때 이를 이미 확인한 바 있다. 연극은 무대의 질서와 현실의 질서 사이의 복잡한 관계를 잊지 않고 응축·체계화 그리고 특히 양식화에 힘을 기울이는 연극을 일컫는다. 연극미학이 소설 미학과 다르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 18세기 중엽부터 유럽의 무대는 가구, 카펫, 골동품 등 일련의 사물들로 넘쳐난다. 이 물건들은 관객에게 가정 내부 분위기를 보다 근접하게 재구성해서 보여주기 위해 등장시킨 것들이었다. 무대 배경은 점점 더 정확해지고 더 ‘사실적이며’ 회화적이 되어간다. 기이하게 가득 채워진 무대 위에서 배우들이 왔다 갔다 한다. 배우들의 의상은 관객들의 옷과 동일하다. 이것은 연극은 일상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도 관객은 연극을 보러 왔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고 말하는 어리석은 이들에게 이른바 ‘제4의 벽’ 이론을’ 내세운다. 배우에게 마치 관객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연기하라는 것을 말하는데 이는 환각을 극대화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된다.
관객은 타인의 대화를 엿듣고 감동적인 가정사를 엿보며 석연치 않은 상거래를 본 듯한 감정을 가질 수 있다. 이는 프로이트가 말한 구성 본능에 따른 관음증적 경향이 아닌가 싶다. 엿보기 심리, 알지 못하는 사이에 훔쳐보는 쾌락을 느끼며 그 안에서 자신의 인생을 바라보게 된다. 대혁명의 단절은 연극분야에도 영향을 미쳤다. 낭만주의 극작가들은 무대 위에서 사회 전체를 동요시키는 움직임 같은, 눈에 보이는 대로의 역사를 이야기하고자 했다. 부르주아적 사실주의 연극에 대한 최초의 일격은 연극을 통해 사회와 그 사회의 갈등을 총제적으로 보여주고, 정치적인 문제들을 제기하려는 의지로부터 비롯되었다. 역사적인 주제의 사용은 과거를 통해 현재를 조명해 보는 기회가 되었으며 그로부터 연극은 다시 불확실해졌고 더 이상 합의에 의해 세상을 만족스럽게 재현하지 못한다. 다른 모든 정열의 모델인 동시에 상징이 된다. 이들 다른 정열을 가진 주인공들은 이상적인 질서를 확립하기 위해 현재의 질서를 어긴다. 이것은 알을 깨고 세상을 깨고 나와 다른 면을 보려는 새로운 창조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기존의 불합리함을 좀 더 합리화시켜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어떤 사상이나 생각을 주입하기 좋기 때문에 양날이 검이 아닐까 생각한다. 낭만주의 드라마의 실패 이후 19세기 연극은 거울의 미학 속에 굳건히 정착한다. 이런 연극 선호 주제는 항상 가정과 돈이다. 극작법은 정확, 명료하다. 모든 영역 가운데 수완을 특히 선호하며 이제 역할과는 별도로 점점 더 존경받아 스타나 신성한 괴물이 된 배우들의 진정한 연기, 그리고 진정한 연출과 무대 배경을 보게 될 것이다. 연극은 현실, 역사, 그리고 그들이 모방한다고 자부했던 실생활과 점점 더 동떨어져서 공허하고 메마른 의식의 장소가 된다.
연극을 혁신하고 기존의 연극에 대해 과격하게 비평하려는 시도가 다각도로 행해지며 총제적인 연극의 위기를 보이는데 기인하고 있다. 자연주의자들의 비평으로 그들은 해결 방안을 악에서 찾아야 한다고 봤다. 과학적인 방법으로 재현 가능한 현실을 망각해 왔으며 연극이 소설처럼 작업되길 원하고 극작가로 하여 연출가에게 맹목적으로 일임하라고 권유한다. 전 유럽에 걸쳐 현대적인 연출을 고안한 것은 자연주의 연출가들이다. 한편 독일에서는 ‘프라이 뷔네’ 영국에서는 ‘독립 극단’이 발전된다. 처음 목적으로 진실이었으며 소설에서 서술하고 있는 역할을 연극에서는 무대 배경이 맡게 될 것이다. 장소는 환경이 되고 환경은 등장인물을 만들어 내고 설명하는 의미를 가진다. 소설과 마찬가지로 연출가 또한 사실에 바탕을 둔 자료와 세부 사항들을 축적하게 될 것이다. 이상적인 연출은 사진술이라는 점이 연극과 영화가 흡사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무대를 프레이밍 하다.
어디를 어떻게 어디까지 보여 줄 것인가? 연극은 무대를 프레이밍 하고 영화는 특정한 프레임을 프레이밍 하게 된다. 마치 사진의 틀 속과 같이 말이다. 선택, 강조, 무시를 전략으로 현실을 있는 그대로를 보여준다기보다 현실의 일부분을 선택, 강조해서 보여주거나 특정한 측면은 무시해서 보여주지 않은 것이다. 1872년 비극의 탄생에서 니체는 미메시스에 대한 급진적인 비평을 내놓는데 그리스 비극에 대한 분석을 통하여 아폴론과 디오니소스를 대비시키며 니체는 그가 보기에 그릇된 고전주의극의 상연과 아주 다른 형태의 연극 사이의 경계선을 그으며 아폴론은 고독한 개인으로 구현하고 디오니소스는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하에서 인간이 융합된 원 측으로 나타난다. 아폴론은 도시, 문명, 담론의 신인 반면에 디오니소스는 강력한 성적 능력을 가진 자연의 신이다. 또한 언어의 질서 가운데 자리 잡는 대신 보편적 조화 원칙인 음악의 질서를 구현한다. 말과 음악 사이의 이 같은 대립은 니체로 하여 대화에 대해 비평할 기회를 제공했다.
부르주아 연극에서 이미 사건을 희생시키면서까지 대화가 지니치게 부풀어지는 것을 보았다. 웅변에 대한 이 같은 비평은 앙토냉 아르토에 의해 다시 행해진다. 이러한 비평은 현대 연극 미학의 하나의 중요한 축을 이룬다. 아폴론이 논리적이고 변증법적인 사상을 중시하는데 반해, 디오니소스에게 고유한 영역은 신화이다. 20세기의 많은 극작가들이 이 같은 신화의 비교할 수 없는 풍요로움을 환기했다. 아폴론적인 질서는 아름다운 이미지를 생산하고, 관객에게 즐거움을 주는 외양에 많은 가치를 둔다. 반대로 디오니소스적인 질서는 대 주연의 기진맥진, 겉모습에 치우친 세계의 파괴, 열정 등으로 통한다. 이 열정은 관객을 서정적 상태, 혹은 예술 창조라는 도취 상태에 잠기게 한다. 아폴론은 인간을 역사 속에, 디오니소스는 영원 속에 둔다. 인간을 그 자신과 그의 한계로부터 끌어내어 역사로부터 떼어 놓는 연극을 이상적이고 완벽하다고 생각한다.
브레히트와 아르토
중요성 면에서 현대 연극에 있어서 아르토의 영향력은 브레히트에 비길 만하다. 브레히트와 아르토는 근본적으로 서로 다른 방식에 의해 무대가 상상 속으로 도피하는 방법이나 장소라는 것을 거부하기에 이른다. 이 점에서 그들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중요시 여긴 카타르시스의 미덕을 깨버렸다. 이러한 거부는 합리성과 타락한 서구 휴머니즘에 대한 보다 폭넓고 결정적인 또 다른 거부감으로 둘러싸여 있다. ‘유럽에서의 예술적 이상은 열광에 ’ 참여하는 ‘힘과는 동떨어진 태도 속에 정신을 투사시키는 것이다. 진정한 문화는 예술에 대한 우리의 무관심을 마술적이고 지나치게 이기주의적인 생각과 대립시킨다. 아르토가 다른 곳, 극소수 혹은 아무도 그를 따라갈 수 없는 어떤 장소에 관해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 상연에 대한 관념인가, 관념의 상연인가? 50년대에 비평계가 여러 가지 연극 선언들을 통합하고 전통에 도전한 작품들을 분류하려 했을 때 소설 분야에서 확립된 표현을 연극에도 적용시켰다. 몇몇 독자 노선을 걷는 작가들을 제외하고 새로운 극작가들은 체계적으로 브레히트나 아르토의 영향 아래 있다.
현대 연극의 기초를 이룬 역사의 폭풍, 미메시스의 위기, 가치 전복 등을 모른 채 고전적 휴머니즘, 거울 같은 무대, ’ 문제극‘과 사상극 등을 조용히 되살리고 있는 당시의 연극에 반대한다. 당시의 연극에 반대를 하는 많은 인물들이 새로운 연극에 속하지 않는 명백한 이유가 있다. 사상의 대담함, 매력적이고 섬세한 언어, 용기 있는 참여에도 불구 현대 연극에 전혀 기여한 바가 없다. 어떤 이들은 지적이고 매력적 특성에 의해 진보된 시각(사르트르와 카뮈)과 새로운 형태를 혼동하는 모든 인텔리겐치아(지적 노동 종사 사회계층)로 하여금 연극에 대한 순응주의적 시각으로 되돌아가게 했다. 환멸을 느낀 댄디의 노련한 구성을 대담한 심미학으로 착각하게 했다. 연극에 대한 수많은 발전과 변태의 과정이 심도 있으며 심미안을 찾기 위해 떠나는 여정처럼 느껴졌다. 앞으로 21세기를 지나 22세기 23세기의 연극이 미디어 매체에 맞서 어떻게 바뀔지 궁금하다. 미래의 연극은 어떨까? 연극도 홀로그램이나 vr, ar이 되는 시대가 올까? 연극의 미학이 계속되길 바라며.. 상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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