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메시스: 믿는 체하기로서의 예술을 읽고.
미메시스는 무엇인가?
처음 책을 집어 들고
미메시스가 뭐지라는 궁금증이 생겨서 바로 찾아보았다. 그리스어로 mim ēsis 모방이라는 뜻이며 자세하게 춤, 몸짓, 얼굴표정등을 나타내며 인간, 신, 사물을 모방하는 것을 의미한다. 신기하게도 나에게도 미메시스의 경험이 어릴 적에 존재했었는데 누가 가르쳐 주지도 않았지만 소꿉놀이를 하며 어린 나는 아빠흉내를 내고 있었고 상대방 여자아이는 엄마흉내를 모방하고 있었다. 그때는 모방의 의미를 모르고 있었는데 모방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거기다 여자아이가 밥을 해준다며 나뭇잎을 뜯어 돌로 빻아서 반찬을 만들고 인형에게 이름을 지어주고 아들과 딸이 되었다. 그런데 그것이 가짜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지만 나와 그 여자아이는 이 사실을 진짜처럼 믿고 있었다. 그리고 나뿐만이 아니라 성인이 된 모든 사람들은 고급놀이라고 할 수 있는 예술들은 기본적으로 재현에 바탕을 두며 우리가 재현을 즐기는 과정에서 믿는 체하기가 작용된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면 ‘재현적 예술’은 무엇일까? 작품이라고 했을 때 허구(fiction) 작품들을 예를 들면 문학작품에서는 전기, 역사, 교과서보다는 소설, 이야기, 설화들이며 허구만이 ‘재현적’이라는 자격을 갖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허구’라는 표현을 인간이 만든 작품들 즉 인공품들에 한정하지 않고 보통 사용되는 것과는 다른 측면들까지 너 넓게 표현되었다. 최근 많은 이론가들은 소설, 회화, 연극, 그리고 영화를 이해하기 위한 모델로서 특히 언어에 눈을 돌려 표준적이고 일상적이고 비 허구적인 맥락에서 자연언어가 어떤 식으로 작동하는지 살피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믿는 체하기에 대해서는 이러한 접근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경향을 저항하려고 한다. 언어 모델이 제공해 줄 것이 많다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는다고 말하며 관심을 가지게 되는 언어의 진지한 사용과 함께 언어 이론을 작품에서 적용시킴으로써 특징들을 밝혀왔는데 모든 모델에 위험이 내포되어 있으며 언어 모델은 허구나 ‘재현적 예술’에 대한 사고에서 지배적인 언어 모델의 한계들은 인지하지 못하고 간과된다고 말하고 있다. 한때 나는 기호학과 논리학이 이 세상의 모든 것을 표현해 낼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재현적 예술’에 대한 사고에 대해서는 어렵다는 주장이 무언가 형용할 수 없는 직감이라는 다른 차원의 존재가 아닐까 생각이 들곤 했다.
허구 혹은 재현적 예술에 열광하는 이유?
그럼 사람들은 허구 혹은 재현적 예술에 왜 이렇게 열광을 하는 것일까? 사람은 위험을 직접 경험하면서 살아가며 그 많은 위험들을 감당하고 감내하면서 살아가고 감정을 느낀다. 그런데 이야기에 사로잡히며 이런 경험을 관음적으로 리스크 없이 모든 것을 해결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정말로 허구 이야기를 믿는다고 가정하고 싶은 강한 유혹이 들기도 하며 그 극 중 인물이 실제로 있을 거라고 생각까지 한다. 안 그러면 왜 사람들이 가짜를 보며 눈물을 흘리고 돈 주고 2시간이 되는 영화를 보겠는가? 허구적 세계와 허구적 존재를 받아들여야 할 문제는 개인에게 있다고 본다. 그리고 이것은 어쩌면 성경에서 말하는 도마의 믿음처럼 예수가 말한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처럼 미메시스에는 성경의 한 획이 그어져 있는 듯하다. 애초에 인류와 동물의 차이가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느냐 안 믿느냐에 차이기 때문에 동물은 화폐를 두고 1차원적인 종이로 생각하지만 인간은 화폐를 다양하게 활용하는 도구로써 그 가치와 종류의 숫자를 엄청나게 증폭시켰다. 화폐로 할 수 있는 것을 말하라고 하면 엄청난 상상이 필요하게 될 것이다. 혼자 하는 상상과 사회적으로 상상하기는 엄연히 다르다. 나는 어린 시절 상상은 혼자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공상 과학 만화영화나 영화를 보면서 공유될 수 없는 나만의 상상을 하곤 했다. 그러다 그것이 나만 상상하는 것이 아닌 다른 사람도 하는 것임을 알게 되고 그전 인류가 상상했던 것이라고 알게 되며 나는 자연스럽게 집단적 상상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어느새 나이를 먹으며 그런 통일된 상상을 하면서 의도적이거나 획일된 상상만 하기 시작하며 말 그대로인 ‘생생함’을 읽어가게 되었다. 하지만 그것이 재현되는 순간 살아나는 실재하는 대상으로 인지하게 되었다. 하지만 반대로 실재하지 않는 대상도 존재한다. 또는 존재하지 않지만 있다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다. 그것은 마치 도사 ‘전우치’나 의적 ‘홍길동’의 존재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아니면 미래에 딥페이크처럼 존재에 대한 의문도 가지게 될 것이다. 누군가에는 참이라는 누군가에게는 허구처럼 말이다.
믿은 채로 감상한다는 것
어쨌든 이러한 재현들을 감상하게 된다. 참이든 거짓이든 판단하기에 앞서 보면서 느끼고 알게 된다. 그러면 왜? 수고스럽게 이야기를 만들어주고 서로에게 몇 대를 걸쳐서 이야기를 해주는 것일까? 우리는 허구라고 해서 무시하지는 않는다.
그 작품들에 감동받고, 매혹되고, 황홀해하고, 황홀해하고, 때론 거의 홀리기도 한다. 이러한 감상의 본성은 무엇일까? 심리적인 접촉으로 느끼며 매우 친밀한 것처럼 느낀다. 그리고 그 인물과 가장 사적인 접근을 한 것처럼 가까워진다. 반대로 공포영화를 보면서 스크린에 나오는 ‘귀신’을 무서워 하지만 반대로 정말로 그것을 무서워했을까? 곧 일어날 실제 세계의 재난에 겁을 먹은 사람의 상태와 유사하다 신체적 반응이 그러했고 아드레날린은 분비되었다. 심리적 상태를 ‘유사 공포’라고 하는데 그것만으로는 진정한 공포가 되지 못한다. 하지만 허구의 대상이 관객에게 말을 걸면 또 이야기는 달라진다.
에드원 s포터의 대열차강도의 마지막 씬에서 관객을 향하여 총을 쏘는 장면은 그 시대에 엄청난 충격을 만들어주었다. 마치 진짜 나에게 총을 쏘는 줄 알았을 것이다. 하지만 현대인들은 더 이상 그것에 속지 않는다. 얼마 전 코엑스 웨이브 전광판을 보고 진짜 파도가 치는 줄 알았다. 스크린이 평면의 벽이 아니라 입체적으로 생겼기 때문에 생동감이 전해진다. 또 다른 새로운 경험이었다. 이처럼 경험은 보는 대로가 진짜인지 가짜인지 구분할 수 없다.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영화 ‘라쇼몽’처럼 보는 대로가 아닌 등장인물들이 진술하는 대로 사건을 보여주며 주장의 타당성에서 상상 안에서 자신이 선택하는 것과 같다.
다양한 매체들
많은 사람들이 소설, 연극이나 뮤지컬, 영화관, TV지상파&종편의 드라마 그리고 요즘 대세인 넷플릭스나 왓챠, 유튜브, 디즈니+등과 같은 OTT 온라인 동영상서비스와 같은 IT기반의 매체를 기반으로 한 매체들을 개인이 휴대 가능한 스마트폰으로 언제 어디서나 가상과 허구를 보고 믿는 체하며 살아가고 있다. 심지어 기믹(gimmick)이라는 전략으로 콘셉트나 캐릭터의 특징(characteristic)으로 가짜인물을 만들어 대중의 관심을 끌어 그것이 페이크(fake) 즉 거짓과 속임수인걸 알면서도 사람들은 믿는 체하며 즐기고 있다. 앞으로 메타버스의 핵심기술인 VR(증강현실)이나 AR(가상현실) 더 나아가 MR(거울세계)로 확장되어 실제 세계를 그대로 반영하여 정보적으로 확장된 가상세계가 구축되어 그 안에서 새로운 ‘참여’하면서 상대방이 말을 걸어오는 것에 믿는 체해야 하는 체험하는 예술의 탄생이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그날은 생각보다 빠르게 오고 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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