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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레히트, 서사극, 낯설게 하기 수법 파헤치기

리프 스토리 발행일 : 2023-04-24

 

브레히트의 낯설게 하기

베르톨트 브레히트

브레히트 그 사람의 세계관

브레히트, 서사극, 낯설게 하기 수법을 읽으면서 많은 생각들이 내 머릿속에 교차했다. 현대 독일의 드라마와 세계 연극의 거장 브레히트하지만 나는 처음 그가 누군지 몰랐다. 셰익스피어나 안톤 체호프 괴테 릴케 아서 밀러와 같은 작가들은 알았지만 브레히트는 처음 들어봤다 하지만 서사극이라는 이름과 양식, 서사극을 서사극답게 만든 ‘‘낯설게 하기라는 이름이 묘한 이끌림을 나에게 주었다. 이른바 소격 효과(Verfremdungseffekt)이다. 베르톨트 브레히트가 태어난 곳은 남부 슈바벤 지방의 아우크스부르크, 페를라흐 산기슭의 작은 골목이다. 아우크스부르크는 독일의 도시들 가운데서도 가장 오래된 도시 중의 하나이다. 19세기에서 20세기로 넘어올 무렵 인구 9만이 채 못 되는 도시였지만 1900년 전후해서 공업화를 통해 이 도시의 경제적 구조가 바뀌었으며 1차 세계대전 중에는 군수공업의 중심지였다. 도한 프롤레타리아 신문이 간행되기도 했던 이 공업도시에는 사회민주당 기관지 민중 신문’ ‘아우크스부르크 민중 신문이 이어져 나왔다. 이렇게 급격한 공업화와 그에 따른 노동운동의 의미가 증대되는 가운데 아직은 관료 조직과 군대의 영향 아래 이 도시 대부분의 주민들은 여전히소시민적이며 농천적인 전통 속에서살아가고 있었다.

 

이런 환경에서 브레히트는 어린 시절을 보냈다. 청년기 시절에 그는 이데올로기적인 애국 지상주의에 비판적이었으며 조국에 관한 작문 과제에 패배주의적 내용을 지나치게 드러냄으로써 퇴학 처분을 당할 뻔하였고 왜 우리는 조국을 사랑하는가?’라는 작문에서 조국이 모국어의 땅이기 때문에 사랑하지만 동시에 다른 국가들도 위대한 영웅들을 키워냈으며 다른 나라에서도 사람들이 잘 살 수 있고 이탈리아에서는 확실히 햇살이 독일에서보다 더 찬란히 빛난다는 사실들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식으로 냉철한 성찰력을 보여주었다. 전쟁이 끝나고 혁명도 끝나 브레히트는 다시 대학으로 복귀하였고 의학보다는 문학으로 그의 취향을 바꾼다그의 마르크스주의 학습은 1926년 경 칼 마르크스의 ‘자본론’ 읽기에서부터 시작되어 베를린의 노동학교 강의에 참석하여 청강한다. 주식 시장의 실제 거래에서 현장 학습을 시도하는 식으로 구체화된다. 그전까지 아웃사이더로 부르주아 시민 계급의 모럴을 비판하고 기성 연극을 뿌리에서 뒤집는 작업에 몰두했으며 니힐리즘과 아나키즘에 가까운 세계관을 지녔었는데 이즘에 빠진다는 것은 시적 정신에 위배되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마르크스주의에 빠져들어간 그의 사상적 성장은 초기 현란한 이미저리(imagery)와 비전으로의 몰입을 억제시켰다.. 이처럼 어떤 환경에서 어떻게 살았는지를 보면 한 작가의 사상에 내포한 세계를 잘 보여주는 거 같다.

서사극의 극형식

나치스에 쫓겨 거의 15년간을 이역에서 떠돌다 최종 망명지였던 미국에서 다시 유럽으로 돌아왔다 잠시 스위스 취리히에 거처를 정했다가 분단 조국 독일의 사회주의 체제 아래 동베를린의 독일 극장, 쉬프 바우어 담 극장에서 전속 극단 베를리너 앙상블을 육성하며 자신의 작품들과 서사극 이론을 실제 무대에 적용시키는 작업에 몰두하던 그는 동베를린 정착 10년도 못 된 1956814갈릴레이의 삶연습 도중에 심근경색으로 급서 하였다.. 동독으로 간 것은 자기 극장과 극단을 제공받으며 그의 마르크스주의적 사회의식이 이데올로기적으로 맞아떨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19491월 동베를린의 독일 극장을 빌려 헬레네 바이겔 주연의 억척어멈과 그 자식들을 상연하여 서사극적 작품의 ‘‘낯설게 하기기법으로 획기적 성공을 거두었을 때 서사극은 전후 유럽 극계의 새로운 사조가 되었다. 서사극 이론은 변증법의 연극을 지향한다. 그가 갑자기 죽음으로써 완성을 보지 못한 서사극은 서사적 연극, 혹은 변증법적 연극을 일컫는 말이다. 서구 연극 이론이 아리스토텔레스 ‘시학’ 이론의 서정시, 서사시(산문·소설), 드라마의 삼분법에 의해 유지 계승되어 나왔다는 사실은 주지하는 바와 같다. 그런 드라마 장르에 시적, 혹은 산문적이라는 수식어가 붙게 된 것이 서사극 이론의 첫출발이었다.. 그렇다면 비 아리스토텔레스의 미학은 무엇일까? 아리스토텔레스의 연극 이론은 감정이입과 카타르시스(정화·배설)가 기본 틀이다. 연극을 보며 극적 상황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무대 등장인물에게 이입시킴으로써 자신의 감정을 정화시킨다. 현실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 꿈을 연극이라는 환상을 통하여 채워 보면서 현실의 좌절이나 불만을 씻어내며 꿈을 그리는 환상의 무대, 착각의 무대가 얼마나 현실과 비슷한가를 좋은 연극 무대의 조건으로 삼는다. 이에 브레히트의 서사극 이론은 이런 환상 연극에 서사성을 가미하여 연극에 빠져드는 것을 차단시키는 기법을 활용한다. 여기서 나는 충격적이었다. 내가 이제까지 알고 있는 극의 몰입에 대한 정반대 되는 개념이었으니 말이다. 감정이입을 시키는 것이 아니라 의식을 개 우는 연극이라는 개념이 신선하게 다가왔다. 이것이 바로 비 아리스토텔레스의 연극이론이라는 건가?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 높은 차원에서 극을 본다는 것이 얼마나 고차원적인지를 다시금 느끼게 하였다. 연극이라고 말할 때는 시학에서 말하는 드라마 장르로서의 극형식과 극장 무대에서 말하는 연극으로서의 극형식 두 가지 가운데 하나를 지칭한다. DramaTheater의 엄격한 구별은 서사극의 극이나 드라마(텍스트)냐 연극이냐의 문제와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것이다. 서사극이라는 말이 개념적으로 혼란을 주는 주요한 원인이 여기서 오는 게 아닌가 싶다. 서사극의 극형식이 문학 장르 상의 유개념으로서의 드라마냐 혹은 문학 장르와는 별도로 존립하는 무대 예술로서의 연극 형식이냐에 따라 서사극의 내용 자체가 달라진다. 서사극의 극형식은 브레히트에 의하면 문학적 드라마의 극이 아니라 그것은 무대 예술의 실천적 행위로써의 연극을 뜻한다. 그가 지향하는 것은 서사시적 이야기체의 구성을 지닌 연극 양식을 수립하려는 것이다.

 

감정이입을 하여 연극 속에 몰입했다가 정서적 대리 만족을 통해 감정을 정화 혹은 배설시키는 종전의 연극에 대하여 서사극은 벤야민 말대로 긴장에서 벗어나 아주 편안하게 즐길 수 있는 연극을 말한다. 벤야민이 설정한 서사극은 관객을 편하게 하고 줄거리는 이미 아는 것으로 그리고 극 중 주인공은 비극적이지 않아야 하고 그가 놓여있는 상황에 관객이 빠져들지 않도록 감정이입을 중단시켜야 한다. 몰입이 아니라 중단이라는 관객을 깨어 잇게 만든다. 몸짓이 인용 가능할 수 있게 된 것도 서사적 연극의 중요한 업적의 하나로 꼽힌다. 그렇게 서사극은 교육극으로서 관객을 연기자로, 또 배우를 관객으로 바꾸어나가는 전환이 용이하며 알기 쉽다고 한다. 이런 점이 기존의 극의 형태와 너무 달라서 처음에는 생소하게 느껴졌다 마치 제4의 벽을 허무는 느낌이었다. 두뇌가 냉정을 유지하는 방법, 교육을 시키려는 목적이 무언가 브레히트가 말하고 싶은 핵심인 거 같아서 그 사람이 왜 이런 연극을 만들게 되었을까 하는 궁금증이 커져갔다. 아마도 그건 토론이 벌어지고 사회의식이 싹트고 깨어난 의식이 비판을 낳고 마침내 사회를, 세계를 개혁하고 싶어 하는 그의 마음에서 오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을 조심스럽게 해 본다.. 체제의 이념 갈등 속에 올바른 판단을 하기 위해서 또한 그러한 체제에 우매하게 속아 넘어가는 군중을 보면서 가슴 아파한 게 아닐까.. 앞에서 내용을 보면 정말이지 극이 낯설게 느껴진다. 우리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살아간다. 알을 깨야 다른 세상을 보듯 동전은 양면이 있다. 그리고 그 사이 중간 면도 있다 어느 한 곳을 보면 매몰되기 쉽다. 이러한 소격화 효과, 낯설게 하기의 기법에 의해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바뀌어버리기도 하고 이미 알고 있던 평범한 것이 특수한, 예기치 못한 것으로 바뀔 수도 있는 것이 참 신기했다.

 

브레히트가 말하는 민중국

브레히트 민중극은 그가 부제로 강조한 ‘Volksstuck’라는 원어의 번역 과정에서 몇 가지 혼란을 야기한다. 유독 <주인 푼틸라와 머슴 마티>에서만 민중극이라는 부제를 붙인 브레히트는 그 단서를 통해 P/M이 코메디아 델라르테식의 엎치락뒤치락 내지는 즉흥극 형식의 놀이성을 부각해 문화 기층이 지닌 대중성과 통속성을 강조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P/M은 민중극이라는 무게보다는 민속극·대중극 내지는 통속극 취향이라는 번역이 옳다. 그러나 민중극 개념이 전승된 예능, 곧 전통적 행위예술 형식을 포괄하는 경에는 이른바 퍼포밍 아트 이론에 내포된 사회성과 제의성이 보다 생생하게 살아 있고 문화 기층의 생활감정이 축제 형식으로 녹아 있다는 의미에서 인류 문명의 고대 심상이나 사유의 흔적을 추출해 낼 수가 있다. 고대 심상이나 사유를 우주 창생과 천지창조에 대한 신화적 위계질서 부여의 코스몰로지로 간주하고 세속적 질서의 중압 끝에 다시 신년, 혹은 계절의 고비마다 신성한 카오스를 재현하여 갱생과 쇄신을 꿈꾸는 축제의 장을 마련한 신화 재현의 제의는 바로 민중적인 삶의 재현이며 공동체의 열광이며 동시에 도취의 현장이다. 그런데 세속이 신성을 지배하고 정치가 제의를, 합리주의가 신비를, 문명이 전통을 압도하며 도시가 농촌보다 우위에 서면서 시대는 변화해 버렸다.

 

태초에 어둠의 카오스(혼돈)를 정복한 빛의 코스모스(질서)가 세계의 중심으로 군림하면서 변두리로 쫓겨난 어둠이라는 비합리성은 여러 가면으로 빛의 중심 세계를 향해 귀환과 복권의 칼을 갈게 되었다. 그 불·비합리의 세계는 반질서의 그것이며 불가사의이다. 결정적으로 부도덕하고 반사회적이며 비일상적이고 그런 점에서 세속의 질서에 반대되는 난장판의 오르기이다. 이 오르기는 축제의 핵심이며 축제가 용납되는 넘치는 방일과 일탈, 가치전도, 상하 도치, 성의 노출을 육화 시키는 혼돈의 어릿광대들이다. 이러한 후예들은 고대 코스몰로지의 흔적이 남아있다. 가장 이기적인 마르크스주의자로부터 가장 원초적이며 비이성적인 신화 세계의 파편을 읽어낸다는 것은역설적이지만 어쩌면 브레히트는 무의식 가운데 한 시대가 지나가는 비합리적 시대가 가고 이성의 시대가 다가오고 있다는 예감 가운데 부당하게 주변으로 쫓겨났던 창조적 카오스로서 민중을 대입시켜 중심의 코스모스가 지닌 계급적, 도덕적, 정치적 허구성 대신에 새 시대의 주인으로 민중=광대를 상정했을 가능성도 있다. 그 주변의 광대를 중심의 핵심으로 탈바꿈시키는 가면의 연극으로서 이른바 투쟁하는 민중, 민속적이라는 개념에 투쟁의 의미를 부여한 민중국을 그는 상정했을지도 모른다.

 

통설의 역전

가장 기억에 남았던 작품은 <코카서스의 백문 동그라미>이다. 구약성서 솔로몬 왕이 얼마나 지혜로웠는지를 보여주는 재판에서 생모와 양모의 아기 뺏기 소송을 하는 것이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통설에 따라 양모는 아기의 팔을 힘껏 잡아당기지만 생모는 차마 그 팔을 끌어당기지 못한다. 어미의 낳은 정을 솔로몬 왕은 판결의 근거로 삼는다. 이 서양의 에피소드가 동양에서는 원나라 때 원곡 화란기로 작품화되었으며 표현주의 작가 클라분트는 화란기를 바탕으로 배묵 동그라미를 서서 그 동그라미 안에 든 아이를 생모와 양모가 서로 팔을 잡아 끌어당기도록 발전시켰다. 1920년대에는 이국취미를 반영한 작가들의 관심이 같은 소재를 극화시켰고 권터, 알프레트 폴케 등의 작품 등이 있다.

 

브레히트는 원숙기에 이를 무렵 같은 소재를 담은 소설 <아우크스부르크의 백문 동그라미>를 썼고 그것을 더 확대시킨 것이 <코카서스의 < 백묵 동그라미>가 된다. 재밌는 것은 이미 그의 소설에서 통설과 아주 반대되는 입장을 취한다. 백묵 동그라미 가운데 선 아이를 힘으로 뺏는 단계에 이르자 차마 아이 팔을 잡아당길 수 없어서 손을 놓아버리는 생모의 이야기를 바꿔 유산 상속이라는 이기심으로 오히려 생모가 잡아당기고 양모가 손을 놓게 만든다. 손을 놓아버리는 것이 아이에 대한 진정한 사랑이며 생모는 아이에 대한 진정한 애정이 없다는 것이 입증되는 통설의 역전이 담겨있다브레히트라는 작가는 기존의 고정관념을 깨어 ‘‘낯설게 하기 수법을 완성시켰는데 처음에 생소하였지만 그 방법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다. 시학만 알던 과거와는 다르게 다른 시각의 각도에서 알을 깨고 나와 다른 세상을 보는 눈과 사고가 필요하다고 절실하게 느끼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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