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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와 그리스 비극: 행복을 추구하는 인간

리프 스토리 발행일 : 2023-05-16

니체와 그리스 비극: 행복을 추구하는 인간

Friedrich Nietzsche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평소 나는 프리드리히 니체를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라는 책으로 처음 접하게 되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소설가인 줄 알았다. 하지만 그가 철학가인 것을 알게 되고 나니 그 책이 새롭게 느껴졌다. 철학가도 소설을 쓰다니! 놀랍다고 생각했다. 아니 속으로 말했다. 그 소설은 차라투스트라가 10년 동안 머무르던 동굴에서 하산하여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펴는 내용이며 철학서로 분류되지만 옴니버스로 구성된 소설처럼 이야기를 전개하며 여러 등장인물과 사물, 시간과 공간에 대한 상징이 담겨있는 문학적 요소가 있는 작품이다. 가장 기억에 남는 대사로는 저 늙은 성자는 숲 속에 있어서 신이 죽었다는 소식조차 듣지 못했구나!’였다. 니체는 무신론자인가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면서 책을 읽다 보면 맨 끝에 항상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라는 문구가 적혀있는데 이것은 마치 성서에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가 이렇게 말했다.라고 쓴 것과 유사해 보였는데 무언가 성서에 관하여 깊은 통찰을 말하려는 게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니체가 표현하는 기독교는 자신의 절대적인 척도와 자신을 믿는 신의 진실성을 가지고, 모든 예술을 거짓의 영역으로 추방하기 때문이 아닐까? 오직 도덕적 가치만을 인정하려고 하는 무조건적 의지를 가졌다고 표현하며 자신에게 기독교는 삶에 있어서 가장 깊이 든 병, 피로, 불만, 쇠진, 빈곤의 징후로 생각되었다고 말한다. 결국 기독교에서의 삶은 경멸과 영원한 부정의 무게에 짓눌려 갈망할 가치가 없는 것으로 그 자체가 무가치한 것으로 느껴져야 한다고 말한다. 도덕과 근본적으로 대립되는 삶에 대한 가르침과 평가, 즉 순수하고 예술적인 하나의 반 기독교적인 가르침과 평가를 고안했다고 말한다. 그리고 니체는 그것을 디오니소스적인 것이라 불렀다.

 

프리드니히 니체: 우리 시대 가장 위대한 철학자

니체의 일생은 1870-1871년에 걸쳐 프로이센-프랑스(보불) 전쟁의 격동기 속에서 그리스인과 그리스 예술, 이른바 명랑성에 대해 오랫동안 의문을 가진다. 전쟁이 끝나고 평화를 얻게 되면서 니체는 음악정신으로부터 비극의 탄생을 최종 정립한다. 니체의 의문은 그리스인이비극(예술)’을 필요로 한 이유로부터 시작된다. , 니체가 볼 때에 그리스인은 가장 성공했으며 아름답고 많은 부러움을 받은 민족인데, 무엇 때문에 비극을 필요로 하는가에 대한 의문이다. 또한 강함의 염세주의를 통해 그리스인을 표현한다. 그것은 몰락, 퇴폐, 실패, 지치고 약화된 본능의 표시가 아니라 행복, 넘쳐나는 건강 그리고 생의 충만함으로부터 비롯되는 삶의 가혹함과 두려움 그리고 삶의 악함과 문제적인 것에 도전하는 용기와 같은 것이다.

디오니소스적인 것이라는 현상에서 탄생한 비극을 말한다. 반면 비극을 사멸케 한 소크라테스 주의는 몰락과 피곤, 병 그리고 무질서하게 해체되어 가는 본능의 징조라고 표현한다소크라테스 주의를 통해 진리를 추구한다는 명복으로 학문을 추구했지만, 염세주의에 대한 두려움이자 그것으로부터 도피에 불과하며 도덕적으로 비겁이나 허위와 같은 것이고 비도덕적으로 교활함이라고 말한다. ‘후기 그리스 문화의 그리스적 명랑성이 단지 황혼에 불과하다면? 염세주의에 대항하려는 에피쿠로스적 의지가 단지 고통받는 자의 조심성에 불과하다면? 모든 학문을 삶의 징후로서 볼 때 학문이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고 모든 학문은 무엇을 위한 것일지 궁금해진다살아가면서 인간은 이르고 미숙한 자기 체험들을 하며 전달할 수 없는 한계에 육박하게 되고 그런 체험들로부터 건립된 자신을 만나게 된다. 도대체 디오니소스적인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물음에 해답을 찾기 위해서는 고통이 필요하다 현대인들과의 관계에서 그들의 감수성의 정도를 묻는다면 이것 또한 정답이 될 것인가?

 

웃는 것을 배워라

니체는 우리가 이러한 위로의 예술을 배워야 하며 전적으로 염세주의자로 남아 있기를 원한다면 웃는 것을 배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웃는 자의 이 왕관 나는 이 왕관을 스스로 내 머리에 썼노라 그리고 나 자신이 나의 웃음을 신성한 것이라 말했노라 ‘ 그렇다 웃음은 신성한 것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문학에서의 비극에 비해 상대적으로 희극의 비중이 적은 것과 정신분석학에서의 거장 프로이트, 라캉, 아들러들도 웃음에 대해 깊게 연구하지 못한 것이 아쉽다. 사람이 가장 행복할 때 웃는데 왜 그러지는 궁금하다. 왜 하필 그 감정은 소리 내어 웃는 웃음일까? 어쩌면 슬픔과 기쁨은 극과 극이라 다른 감정들보다 극적이다. 슬픔은 소리 내어 울고 기쁨은 소리 내어 웃고 그렇기 때문에 둘 다 신성한 것일까?

 

해체의 시대

니체는 자신의 유고집에서 ’ 소포클레스‘시대는 해체의 시대이다.라고 단언한다. 왜냐하면 소포클레스 시대는 전쟁의 참상 속에서 그리스인의 인생관은 새롭게 변화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이스킬로스 비극의 기교적인 부분에 탈피함으로써 성장할 수 있었다. 그의 비극 작법은 3기로 나눈다. 초기는 아이스킬로스풍의 장중 화려한 작풍, 중기는 엄밀한 기교주의, 후기는 원숙기로서 등장인물의 성격과 일치하는 문체로 씌어 있다. 현존하는 7편을 연대순으로 보면 아이아스, 안티고네, 오이디푸스 왕, 엘렉트라, 트라키스의 여인, 필로크테테스, 콜로노이의 오이디푸스 등을 썼다. 페르시아 전쟁에서부터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끝날 때까지 전란의 일생이라 할 수 있다. 그리스 비극에서 가장 비극적인 인물인 오이디푸스는 영웅적인 재능을 보유하고 있지만, 순간의 오류로 인해 비참하게 나락으로 떨어지는 운명을 타고난 자다. 니체는 오이디푸스를 ’ 그리스적 명랑성의 원형으로 보았다. 친부를 살해한 자, 생모의 남편이 된 자,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푼 자, ’ 삼위일체‘라고 본다. 이는 인간으로서 자연스럽지 않은 행동을 함으로써 자연에 저항하여 승리한 것으로 이해했다. 여기서 자연을 거역하는 만행을 저지르는 디오니소스적 지혜를 잘 보여준다. 이어서 스킬로스가 프로메테우스를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점을 강조한다. 아이스킬로스가 묘사하고자 한 프로메테우스는 예술의 대가로서 인간을 창조하고 제우스 신에 대항한 오만하고도 위대한 천재였다. 그로 인해 받을 영원한 고통은 지혜의 예술가로서 엄청난 자부심을 끌어안고 있는 자다. 이처럼 아이스킬로스는 프로메테우스에게 아폴론적인 요소를 동시에 부여했다. 그렇기 때문에 프로메테우스에게서 디오니소스적이면서 아폴론적인 ’ 이중성‘을 가진 존재임을 알 수 있다. 결국 니체는 고대 그리스 비극에서는 디오니소스적 고통만을 다루었고, 무대 주인공도 언제나 디오니소스가 가장한 인물이라고 보았다.

 

해체주의의 시초

니체와 해체주의에서 해체주의는 전통적이고 이성적이며 정형화된 형식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것을 해체주의라고 하는데 이러한 해체주의에 사람들이 열광하는 이유로는 해체주의가 주는 해방감을 주기 때문일 것이다. 빈틈없는 이성으로부터 벗어나는 해방감을 주기 때문이라는 것. 그리고 시대가 지나 20세기가 되면서 철학을 어떻게 체계적으로 세울 수 있냐는 질문이었다. 아마도 과학의 발달로 인해서 철학이라는 존재가 그 자리를 조금씩 내주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조심스럽게 생각해 본다. 이러한 생각의 포문을 연 사람이 프로이트, 마르크스, 니체이며 프로이트는 인간의 무의식에는 성적 충동과 폭력적 욕망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고, 마르크스는 인간은 결국 물질이 규정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니체는 이전의 모든 철학적 전통을 부숴버려야 한다고 말을 했으며 그중에서 특히 니체를 해체주의의 시초라고 할 수 있다.

 

아폴론 VS 디오니소스

예술 형이상학의 구조에서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으로 나뉜다. 니체는 예술을 표현하기 위해 그리스 신화에서 아폴론과 디오니소스라는 두 그리스의 신을 빌려 논의를 전개했다. 둘 다 모두 제우스(Zeus)의 아들이지만, 이 두 신은 전혀 다른 탄생과 성장 배경을 갖고 있으므로 그들이 상징하는 것 또한 매우 다르다. 디오니소스는 그의 인간인 어머니 세멜레를 질투한 제우스의 아내 헤라가 그녀를 속여서 제우스가 헤라에게 접근할 때와 똑같은 모습으로 나타나게 해 달라는 소원을 하도록 권하였다. 어떤 소원을 들어주기로 약속한 제우스는 본의는 아니었지만 번개의 모습으로 나타났기 때문에 세멜레는 그 자리에서 타 죽었다. 그러나 태내에 있던 디오니소스는 살아나 제우스의 넓적다리 속에서 달리 찰 때까지 자란 끝에 태어났다. 또한 이집트, 시리아, 아시아 전역을 떠돌아다니며 포도재배를 각지에 보급하여 문명을 전달하고 그는 지옥에서 어머니인 세멜레를 데리고 나와 천상에 있는 신들의 자리 앉혔다. 아폴론은 올림포스 12 신 가운데 하나로 제우스와 레토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다. 여신 아르테미스와는 쌍둥이 동기간이다. 레토는 제우스의 아내 헤라의 질투로 출산할 장소를 찾지 못하다가 델로스 섬으로 도망쳐 그것에서 아폴론을 낳았다고 전해 온다. 아폴론은 그리스계의 이름이 아닌 것으로 보아 동방의 소아시아나 북방민족으로부터 이입된 신이며 본래는 목자의 수호신으로 생각된다. 노미오스, 리카이오스, 스민테우스 등의 호칭을 가진 것은 이리나 쥐로 인한 피해를 막는 힘을 나타낸 것으로 해석된다. 나중에는 그리스적 성격과 문명의 대표적 신이 되어 국가에 있어 중요한 도덕이나 법률을 주관한다. 특히 아폴론은 살인죄를 벌하고 그 더러움을 씻어 주는 힘을 지녔다. 이렇듯 서로 다른 배경을 가진 두 아폴론과 디오니소스는 그리스 신화에서 서로 대립된 쌍으로 존재하며, 니체가 예술을 설명하는 원리로써 적용했다. 니체는 이 둘은 바다와 배에 비유한다. 디오니소스적인 힘은 바다처럼 여기저기 끊임없이 유동하고, 혼란스럽고, 역동적이며, 때로는 파도가 소용돌이쳐서 위험하기까지 하지만, 배 안에서 인간은 평안함을 느낀다. 배는 바다의 요동에 따라 자연스럽게 흔들린다. 따라서 인간은 두 힘의 조화를 통해 안정 속에서 충만함을 느낀다. 태양빛에 비쳐 아름답게 찬란히 빛나는 산속의 고요한 호수 바닥에는 그 바닥이 어디인지 알 수 없는 무서운 깊이가 감추어져 있다. ’ 무서운 깊이가 디오니소스적인 것이며 그 깊이 위에 아름답게 빛나고 있는 데 지니지 않는 표면적 현상이 아폴론적인 것이다. 니체는 모든 존재의 기초로서 세계의 디오니소스적 근저는 바닥 없는 심연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니체는 아폴론적 예술보다 디오니소스적 도취의 예술을 높이 평가했다고 한다. 아마 그 알 수 없는 바닥 없는 심연의 깊이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마치며..

심연의 깊이.. 비극.. 현대인들은 이런 비극을 보면서도 반대되는 행동을 추구한다. 욕구, 축제, 오락, 새로운 제의에 대한 욕구가 정말로 결핍, 우울 고통에서 자라 나오다 본능적으로 다시금 안전과 즐거움을 추구한다. 살아가면서 매번 고통을 느끼는 사람들은 무엇 때문에 살아가는 걸까? 현상의 차별적인 모습의 상, 헛된 생각인 분별, 지혜의 정지, 만유의 본체로 사실 그대로의 진리인지 모르는 무지에 대한 두려움 등등 인간은 우주에서 보면 작은 먼지이지만 물음표를 강하게 남기며 아득바득 살아간다. 비극이라는 결론은 잔인하지만 그것을 교훈 삼아 그 비극에서 벗어나려 한다. 그래서 더 찾아보는 것일까?

현대에 그리스인들은 파산했다. 말 그대로 비극이다. 그리스가 유로존을 비롯해 국제 사회에서 빌린 돈을 갚지 못하여 디폴트 위기에 빠지면서 그들은 앞에서 설명한 그리스 비극은 완성되었다. 찬란한 문화유산을 가졌지만 그 문화에 취해 더 이상은 발전은 없어서 아쉽다. 아니 어쩌면 그것에 너무 의지하기 때문에 이런 비극이 발생하지 않았나 싶다. 어서 그리스인들은 비극의 발판으로 새로움으로 도약이 필요하다. 그래도 인간은 행복을 추구하기에 디오니소스적 이기보다 아폴론적인 예술로 웃고 싶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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